코로나19로 만나기 힘든 친구들
모처럼 부산친구 부부 세집모여
가덕도로 나들이를 떠난다.
일제시대의 아픈역사가 남아있는 섬~~!
가덕도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천가동에 속한 섬으로, 면적 21.073km2, 해안선 길이 36km이다. 명칭 유래를 보면 예로부터 섬에서 더덕이 많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가덕도는 천가산의 연대봉(煙臺峰, 459.4m), 국수봉(269m)을 중심으로 산지가 발달하였다.
북동쪽에 가로놓여 있는 눌차도(訥次島)는 사주에 의해 만들어진 육계도이다. 가덕도는 통일신라 때 당나라와의 무역을 하는 데 있어서 주요 항구 중의 하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웅천군(熊川郡)에 속하였다. 1908년 창원군에 편입되고, 1910년 마산부(馬山府)에 소속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다시 창원군에 편입되었다. 1980년 창원시의 승격으로 의창군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에는 부산광역시 강서구에 편입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덕도 - 부산과 거제도를 잇는 역사의 섬 (한국의 섬 - 경상남도·경상북도, 2016. 7. 25., 이재언)
대항인공동굴 <새바지항>
부산 강서구 대항동에 있는 가덕도 해안에 일본군이 만든 인공 동굴.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조선 내 일본군은 일본이나 태평양 지역으로 배치되었다. 1944년 중반 이후 일본군의 전력이 급강하하자 조선의 일본군들은 본토 결전을 준비하면서 한반도 남해안의 경비를 강화하였다. 원래 진해만요새사령부의 관할은 마산 권역과 부산 권역이었는데,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부산 요새가 중요해지자, 진해만요새사령부의 중요 시설들이 1941년 부산으로 이전하였다. 부산 요새는 일본의 시모노세키, 이키, 쓰시마와 함께 대한 해협을 방비할 임무를 부여받고, 부산 인근에 독립 고사포 1개 중대가 편성되기도 하였다. 부산과 인근의 부대시설은 대한 해협의 보존에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한편 미군은 조선을 일본 본토 공격의 거점으로 활용할 계획을 논의 중이었다. 1945년 대한 해협 상공에 미군기가 출몰하고, 대한 해협에 미군이 설치한 어뢰가 조선 내 일본군의 일본 본토 이전을 제어하였다. 이즈음 미군이 일본 본토보다 한반도에 상륙하여 거꾸로 일본을 공격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이에 일본은 부산과 주변 해안에 미군 상륙 작전을 대비하기 위한 방어 시설을 구축하였다. 가덕도 대항 마을의 인공 동굴도 이와 같은 정세에서 제2차 세계 대전 말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인공 동굴은 현재 10여 개 정도 발견된다. 마을의 노인들에 따르면 가덕도 북쪽의 탄광 노동자들을 데려와 인공 동굴을 만들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덕도 대항 인공 동굴 [加德島大項人工洞窟]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외양포마을
외양포 마을은 원래 양천 허씨 집성촌이었다. 외양포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16세기 무렵이었고, 당시 약 80호 정도가 거주하였다 한다. 지금은 외양포가 대항동 대항 마을 아래의 자연 마을이지만, 애초는 대항 마을보다 더 큰 마을이었다.
외양포 마을의 비극은 러일 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 8월 3일 일본이 진해만을 탈취하여 ‘진해만요새사령부’를 설치하고, 부산·진해·마산·가덕도·지심도·저도·거제도 등 진해만과 그 이웃의 육지와 섬에 진해만 요새 중포병 대대를 설치하기로 결정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04년 11월 27일 가덕도 외양포에 막사와 함께 포대 6문, 경포대 2문을 갖춘 포대 진지가 설치되었고, 1904년 12월 12일 진해만 요새 포병 대대 제2중대가 주둔하고, 12월 20일 중포병 대대가 이동해 왔다. 이 과정에서 기존 주민들에 대한 강제 이주가 이루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불법적 토지 점령에 대해 강력히 저항하였으나, 총칼을 앞세워 위협하는 일본군을 당할 수 없어 누대로 이어온 삶의 터전을 비워 주고 고개 너머 대항 마을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인 1905년 4월 21일에는 진해만요새사령부가 편성되어, 5월 7일 외양포에 상륙하였다. 그리고 진해만 요새를 일본 연합 함대의 근거지로 하여 1905년 5월 27일~28일의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은 러시아 발틱 함대를 물리치고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즉, 진해만 요새 덕분에 승기를 잡았으며, 그 한가운데 외양포의 사령부와 포병 대대가 있었던 것이다.
현재의 마을이 된 장병들의 주둔지에는 관사, 막사, 창고, 무기고 등이 있어, 해방 후 고향을 되찾은 주민들이 지금도 일제 강점기의 옛 모습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덕도 외양포 마을 주민들의 적산 가옥 생활기 [加德島外洋浦-住民-敵産家屋生活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대항 사전예약한 <소희네집> 식사
가덕도 검색하면 맛집으로 바로 나오기에 사진은 취소.
식사는 무조건 한상에 32,000원,
1인당 개인식사비는
1인32,000 2인16,000
3인11,000원 4인8,000원
4명은 적당하겠지만 4명,8명...
아니면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놀차도 벽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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